조선 시대 - 조선의 문화 - 성리학, 양명학, 실학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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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
  • 퇴계 이황은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“성학십도”를 저술하였다.
  • 퇴계 이황은 주자의 사상을 총정리한 주자서절요를 저술하였다.
  • 퇴계 이황의 성리학이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성리학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.
  • 퇴계 이황은 주자학의 교조화를 비판하며 지행합일의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이 전래되자 정통 주자학을 벗어난다는 비판을 하였다.
  • 퇴계 이황은 이(理)와 기(氣)를 분리하여 이(理)의 역할을 중요시한 을 주장하였다.
  • 율곡 이이는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을 제시한 “성학집요”를 저술하였다.
  • 율곡 이이는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한 “동호문답”을 저술하였다.
  • 율곡 이이는 성리학을 처음 배우는 학도들의 입문서로 “몽요결”을 저술하였다.
  • 율곡 이이는 기(氣)의 역할을 중요시한 “”을 주장하였다.
  • 남명 조식은 학문의 천성을 강조하여 임진왜란 때 , 등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다.
조선 후기 성리학의 변화
  • 우암 송시열은 의 영수로 “주자가례”를 강조하는 등 성리학을 대화하였다.
  • 서계 은 “사변록”에서 유교 경전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시도해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.
  • 하곡 제두는 소론 출신의 학자들과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강화 학파를 형성하였다.
  • 호락 논쟁은 18세기 노론의 심성 논쟁으로 충청도 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을 주장하였고, 서울과 경기 지방 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을 주장하였다.
조선 후기 실학 – 농업 중심의 개혁론
  • 반계 유형원은 “반계수록”에서 신분에 따라 토지를 차등 분배하는 전론을 주장하였다.
  • 성호 이익은 자영농 육성을 위해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으로 설정하고,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는 전론을 주장하였다.
  • 성호 이익은 양반, 과거, 노비, 승려, 미신, 게으름을 6으로 규정하여 비판하였다.
  • 성호 이익은 화폐 유통에 비판적이어서 전론을 주장하였다.
  • 성호 이익의 대표 저서로 “성호사설”, “우록” 등이 있으며, 등이 이익의 사상을 계승하였다.
  • 여유당 정약용은 “전론”에서 마을 단위 토지 분배와 공동 경작하는 여전을 주장하였다.
  • 여유당 정약용은 국가 제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한 “경세유표”, 지방 행정의 개혁안을 담은 “목민심서”, 형법 법률서인 “흠흠신서”를 저술하였다.
  • 여유당 정약용은 “학론”에서 성리학의 폐해를 지적하였다.
  • 다산 정약용은 거중를 제작하여 화성 축조에 활용하였다.
  • 다산 정약용은 한강에 놓았던 다리를 설계하였다.
  • 다산 정약용은 “마과회통”을 지어 종두법을 소개하였다.
  •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의 역사 지리를 정리한 “아방강역고”를 저술하였다.
조선 후기 실학 –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
  • 농암 유수원은 “에서 상공업 진흥을 위해 사농공상의 직업적 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.
  • 담헌 홍대용은 “의산문답”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.
  • 담헌 홍대용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천의를 제작하였다.
  • 담헌 홍대용은 무한우주을 주장하며 전통적인 화이관에서 벗어날 것을 역설하였다.
  • 연암 박지원은 “양반”을 지어 양반의 허례와 위선, 무능을 풍자하였다.
  • 연암 박지원은 노론 가문 출신으로 연행사를 따라 청에 다녀와서 “열하일기”를 저술하였다.
  •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, 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.
  • 연암 박지원은 정조의 윤음에 따라 농서인 “과농소초”를 저술하였다.
  • 초정 박제가는 “북학에서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여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하고, 의 이용을 강조하였다.
  • 초정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되어 활동하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