조선 시대 - 조선의 정치 - 선조~효종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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선조 – 붕당의 형성 해설보기
  • 선조 때 사림들은 정치의 청산 문제와 이조 전랑 임명을 둘러싸고 으로 나뉘었다.
  • 이이와 성혼의 문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은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에 소극적이고 이조 전랑직과 관련하여 을 지지하였다.
  • 조식과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은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에 적극적이고 이조 전랑직과 관련하여 을 지지하였다.
  • 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들이 주도한 기축옥사에서 들이 피해를 입었다.
  • 선조 때 서인 정철이 세자 책봉을 건의한 의 사건으로 은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.
  • 선조 때 은 기축옥사를 주도한 정철의 처벌 문제로 온건파인 과 강경파인 으로 나뉘게 되었다.
선조 – 임진왜란 해설보기
  • 1.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관군은 부산에서 항전하였다.
  • 2. 신립이 충주 탄금에 배수진을 치고 항전하였다.
  • 3. 한양과 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선조는 로 피난하였다.
  • 4.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산도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하였다.
  • 5. 김시민이 이끄는 조선군이 주성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.
  • 6. 조명 연합군이 양성을 탈환하였다.
  • 7.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.
  • 8. 고경명, , 영규 등은 금산에서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였다.
  • 9. 일본과의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중앙군인 훈련도감과 지방군인 속오이 설치되었다.
  • 10.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량 해전량 해전에서 왜의 수군을 대파하였다.
  • 11. 임진왜란 후 승병장으로 활동했던 이 회답 겸 쇄환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.
광해군 해설보기
  • 광해군은 전후 복구 사업으로 사업과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.
  • 광해군은 공납의 기준을 토지 결수로 하는 대동을 실시하였다.
  • 광해군 때 허준이 중국과 우리나라 의서를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편찬하였다.
  •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일본과 무역 재개를 위해 기유약조를 맺고 부산 초량에 을 설치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무역을 허용하였다.
  •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.
  • 광해군 때 명의 요청에 따라 홍립이 이끄는 부대가 파병되었으나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후금에 투항하였다.
  • 광해군 때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이 국정을 주도하였다.
  • 광해군은 계축옥사를 일으켜 계모인 인목 대비를 하고 이복형제인 영창 대군을 하였다.
  • 들은 폐모살제와 명의 재조지은을 배신한 중립 외교를 펼첬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켰다.
인조
  •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.
  • 인조반정을 둘러싼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도성을 떠나 공주 공산으로 피란하였다.
  • 이괄의 잔당이 후금에 투항해 인조반정의 부당성을 호소하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정묘호란을 일으켰다.
  • 정묘호란 때 용골산성에서 이 의병을 이끌고 항전하였다.
  •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로 피란하였다.
  • 정묘호란 때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강화하였다.
  • 후금은 국호를 으로 바꾸고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병자호란을 일으켰다.
  •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에서 이 관군을 이끌고 항전하였다.
  •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고,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한 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.
  • 병자호란 때 은 근왕병을 이끌고 교산 전투에서 승리하였다.
  • 인조는 삼전에서 항복 의식을 거행하고 청의 군신 관계 요구를 수용하였다.
  • 병자호란 후 청에 인질로 세자 대군 등이 끌려갔다.
효종
  • 효종은 병자호란 때 청에 당한 수모를 갚고자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다.
  • 효종은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어영을 확대하였다.
  • 효종 때 북벌 운동은 시열 등의 주도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.
  • 효종 때 청은 연해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였다.
  • 효종은 선 정벌을 위해 총 부대를 파견하였다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