근대 - 근대의 사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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개화파의 형성과 분화
  • 1860년대 , 오경석, 유홍기 등의 상 개화파는 문호 개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.
  • 1880년대 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에 영향을 받은 온건 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받은 급진 개화파로 분화되었다.
  • , 김윤식, 어윤중 등의 온건 개화파는 동도서기론에 사상적 바탕을 두고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였다.
  • , 박영효, 홍영식 등의 급진 개화파는 문명개화론에 사상적 바탕을 두고 적극적 개혁을 추구하였다.
  •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나 주동자들이 로 망명하였다.
위정척사파의 변화
  • 1860년대 , 기정진 등의 위정척사파는 척화주전을 주장하며,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하였다.
  • 1870년대 왜양일체을 주장하며 강화도 조약에 반대하였다.
  • 1880년대 등의 영남 유생들은 영남만인를 올려 조선책략을 비판하고 과의 수교를 반대하였다.
  • 1890년대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반발하여 일어난 을미의병들이 주도하였고, 출신 인석이 이끄는 의병이 충주성을 점령하였다.
  • 1890년대 을미의병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으로 대부분 해산하였다.
  • 1900년대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하여 첫 평민 출신 의병장 ,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.
  • 1900년대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의 참여로 전투력이 되었다.
  • 1900년대 정미의병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3도 창의을 창설하고 각국 영사관에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.
  • 1900년대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해 의 선발대가 동대문까지 진출하였다.